‘하이트’ 네임 탄생 스토리

‘하이트’ 네임 탄생 스토리

By on 2015-02-14 in Brand Column | 0 comments

본 칼럼은 지난 2012년 5월에 작성된 것입니다. 일부 내용의 오류가 있겠지만, 유효한 내용도 있어서 홈 페이지에 다시 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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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 브랜드의 탄생은 매우 어렵다.

오죽하면 신제품 10개 중 성공하는 것은 1~2개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까.

탁월한 기능, 맛, 특징을 가진 제품임에도 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브랜드가 얼마나 많은가. 유통이 따라주지 못해서, Communication이 원활하지 못해서 혹은 Name 등에 제품 컨셉을 녹여 넣지 못해서… 시대를 너무 앞서 갔거나, 대형사의 물량 공세 때문에…

히트 브랜드가 되기 위한 수많은 변수 중에서 Name의 탁월성이 뒷받침된 제품은 과연 몇이나 될까. (언론 등에서는 Name이 우수하여 성공한 제품사례가 가끔 발표되기도 한다)

Name이 좋아서 히트한 제품을 거론하는 사례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롯데칠성의 ‘2% 부족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허구인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롯데칠성이라는 막강한 유통파워를 자랑하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견/중소기업에서 나온 제품이었다면?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병행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마케팅 활동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작동한 결과, 빅 브랜드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는데, Name이 ‘깃발’역할을 담당하기에 대부분의 과정은 생략되고 ‘이름 때문에 히트한 것이야…’ 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한 일부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Name의 중요성을 간과하기는 매우 어렵다.

수많은 요인 중 Name의 우수성이 빅 브랜드의 탄생을 돕는 핵심 요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면에서 다소 오래된 버전이나 ‘이름’때문에 히트했다고 여러 지면에 소개되었던 ‘하이트’ 탄생 스토리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이트 브랜드1

국내 마케팅 역사상 가장 놀라운 역전 드라마를 펼쳤다는 ‘하이트 신화’는 93년 ‘하이트’ 출시 이후 오랫동안 마케팅 현장 및 네이밍 사례에서 자주 언급되어 왔던 사례이다. ‘하이트 맥주’로 인해 부동의 1위였던 OB맥주의 부침이 시작되었고, 조선맥주는 사명까지 ‘하이트맥주’로 바꾸었다. 조선맥주의 뒷목을 겨누던 ‘카스’는 현재 OB맥주 가족이 되어 있기도 하다. 15여년 동안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과정속에서 당시 극적인 라이벌 관계를 펼쳤던 하이트와 OB는 각각 ‘참이슬’과 ‘처음처럼’이라는 또 다른 시장(소주)을 놓고 밀릴 수 없는 경쟁구도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이에 가끔씩 실적 이야기를 하다가 나오게 되는 ‘하이트’ 개발 사례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주섬주섬 엮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딸아이가 자꾸 ‘하이트’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본 칼럼을 쓰게 됨. ‘하이트’ 네이밍한 사람이 많은 돈을 벌었다는데… 맞아요? 해서…)

탄생 동기

하이트 맥주가 출시되던 시점인 93년 당시로 돌아가 보자.
벌써 20여년이 지난 일이기도 하다.

국내 맥주 시장은 OB와 조선 두 회사의 독과점 구조였는데, 모든 면에서 OB맥주의 압도적 우위가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필자가 들은 말에 의하면, 조선맥주는 연명 상태였다고 한다. 조선맥주의 생사여탈권을 OB맥주가 쥐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OB맥주의 입장에서는 조선맥주가 죽어 넘어지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선맥주가 사라지는 순간, 독과점이 독점이 되기에 정부의 간섭이나 또다른 대형사의 시장 진입이 허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변함없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OB맥주가 우려할 만한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진로쿠어스의 탄생이다. 시장 점유율, 유통 등 모든 측면에서 OB맥주와 대등 혹은 우위를 보이던 소주업계 거인 ‘진로’가 맥주시장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시장의 구도는 2파전에서 3파전으로 확대되었고, OB맥주의 보호(?)하에 있었던 조선맥주는 더 이상 그러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맥주의 시장 점유율이 회사 운영을 위협할 정도로 떨어지면, OB맥주에서 제품 출고를 자제하는 방법으로 조선맥주를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3사 모두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전을 치르게 되었으니, 3사가 준비한 비밀병기는 ‘비열처리’맥주였다.

박복동 소장

하이트 브랜드 탄생의 핵심 주역은 마케팅 컨설턴트였던 박복동 소장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 분은 하이트가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94년에 ‘하이트 마케팅 신화 (나남출판)’라고 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당시, 박복동 소장은 한국마케팅전략연구소라는 조그마한 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시던 중에 조선맥주(지금의 하이트맥주)와 마케팅 컨설팅 계약을 맺었던 모양이다. 작은 체구에 눈빛이 반짝반짝 살아계시던 분이셨는데, 컨설팅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2가지 사항을 핵심 의제로 삼게 된다.

첫 번째는 소비자 맥주소비 행동 표본 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것인데, 별 보일 없었던 이슈 하나를 핵심 이슈로 끌어올린 점이다. 박복동 소장은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맥주선택의 핵심 기준을 ‘맛’으로 삼았는데…. (필자 기억으로는) 5% 정도의 소비자들이 맥주선택의 기준을 ‘물’로 삼은 부분을 특별히 주목했다. 생각해 보면, 맥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물’이라는 의견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그러한 이슈 자체가 제기된 적이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물’을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포인트로 설정하자는 박 소장의 주장은 맥주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깨끗하고, 순하고, 맛이 좋고, 원료 좋은… 이러한 이야기 패턴을 ‘물이 좋은’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두 번째는 개별 브랜드로의 전환을 Client에게 강력히 요구한 점이다.

당시의 맥주 브랜드 패턴은 OB 스카이, OB 슈퍼 드라이… 크라운 슈퍼 드라이 등등 브랜드 라인 확장이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통합 브랜드의 도움닺기를 하지 않고는 개별 브랜드가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는 견해가 맥주 시장을 지배하던 중이었다. 제조공법이 열처리에서 비열처리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러한 경향을 무시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박 소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크라운’이라고 하는 통합브랜드의 도움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개별 브랜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2가지의 결정적 방향 전환이 국내 맥주 시장 전체를 흔드는 기폭제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하이트 성공신화’의 일등 공신은 박복동 소장님이 분명하다.

네이밍 회사 선정

당시를 생각해 보면, 네이밍 회사는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네이밍 회사가 십수개 있지만, 당시에는 인피니트와 코틱 (브랜드앤캄파니의 전신)이 거의 유일한 상황이었다. 법률 사무소 계열이었던 코틱 대비, 인피니트의 맨 파워가 보다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인피니트로 네이밍이 흘러오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박소장님이 먼저 전화주셨고, 받은 사람이 필자 본인이었으니까…

당시, 인피니트 네이밍팀은 박OO과장 (지금은 소디움 파트너스의 이사로 계심), 필자, 서OO사원( 지금은 네임넷의 대표로 계심) 그리고 김OO (과천에서 재미있게 사시는 중)으로 구성된 상황이었다.

네이밍 과정

비용, 기간 등 기본적인 협의가 완료된 다음 진행된 조선맥주 본사에서의 첫 미팅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영등포 조선맥주 공장은 본사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미팅 첫 날 중국집에서 탕수육, 팔보채 등 상당한 분량의 요리를 시켜 놓고 병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새롭다. 아직 뚜껑을 얻지 않은 맥주였는데, 뚜껑에 세금이 붙기 때문에 해당 맥주는 비용이 아주 싸다고 했다. 당시의 맥주 가격이 기억나진 않지만, 병뚜껑이 없는 맥주는 한 병당 90원 정도라나 뭐라나 (원가)…

그렇게 해서 점심식사를 겸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2달여 간의 사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네이밍의 핵심 과제는 박소장이 주장한 ‘지하 150M 천연 암반수’를 부각시켜 달라는 것이었는데… 맥주에서 암반수라니… 하고 혀를 끌끌 차던 기억도 난다. 프로젝트가 ‘하이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소소한 업무에 치이면서 4명이 2~3주 작업하다가 보고를 하게 되었다. 아마, ‘하이트’는 1차 보고서에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핀잔을 받은 후보안이었다. 4명이 동시 발상하여 한꺼번에 후보안을 모은 다음 각자 다시 제안할 만한 후보안을 선택하고, 그렇게 모아진 후보안 중 일부를 상표조사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누가 제안한 네임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결국, 팀원의 작품인 것이다. 1차 보고시 별 볼일 없는 네임 중 하나가 ‘Hite’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 하면… 지하 150M와 Height, Highlight 의 줄인 말인 ‘Hite’가 이미지 결합이 되는가? 라는 질문에 배석했던 필자나 보고자였던 박OO과장님이나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기에… 그래서 다시 작업 !

2번째도 실패, 3번째도 실패, 4번째는 어이쿠…

당시 조선맥주의 카운트파트가 김정수 과장님이었는데, 아마 세 번째 부터인가? 보고하러 가도 커피 한잔을 주는 배려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세 번째 보고는 필자가 한 것 같은데… 조선맥주 실무자들끼리 수근대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저 작명가들 때문에… 실력도 없는 것들이 돈은 비싸게 받고… 그렇게 그렇게 4차에 걸친 보고가 지루하게 이어진 것이다.

보고가 끝날 때마다 인피니트를 선택해 준 박 소장님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그러면서 들었던 결정적 이야기 !

보고가 끝난 다음날이면 제출한 리포트와 논의 내용까지 결합된 보고서가 오비맥주 CEO 책상에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조선맥주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쪽에서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전언까지 듣는 상황이었나 보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맥주 출시 시기를 늦추면서까지 네임을 개발할 수는 없고…

최종안 선정 과정

네 번째 보고가 끝난 다음 노골적인 불만이 조선맥주 참석자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하 150M를 달라는데 들고 오는 후보안은 빙(氷)빙(氷) 한다고… 그 사태를 수습한 분은 박 소장님이었다. 이제 후보안을 충분히 받았으니까, 더 이상은 작업하지 말고 몇몇 후보안을 선정하여 소비자 조사를 시행하자고…그러면서 1차 리포트부터 4차 리포트까지 전체를 펼쳐 놓고 협의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려와 걱정 속에 최종 결정된 압축안은 Hite, Ving, Vivis, Deep, O-Touch 등이었을 것이다.

소비자 200명에게 선호도 조사를 시행해 달라는 게 박소장님 요청이었는데 (조선맥주를 대신해서 주도적으로 진행) 이럴 수가… 그 비용은 별도 정산되지 않는 비용이었다. 소비자 조사를 하려면 조사회사에 의뢰하여야 하는데… 결국 좋은 네임을 제안하지 못한 죄로 조사 비용은 떠안게 된 것이다. 이를 어떡하지 하는 와중에 협의는 끝나고 별도로 우리를 불러낸 박소장이 제안한 방식은 간이 조사였다. 한 100여명만 조사하여 대략적으로 선호도를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 소장 본인이 보기로는 ‘하이트’가 괜찮아 보이는데 (제품 컨셉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조사 결과를 적절히 조정하라는 팁도 잊지 않고 해 주셨다.

박소장의 팁을 바탕으로 ‘빌딩 타기’를 해야만 했던 기억이 난다.

추가 비용이 없던 관계로 필자 본인이 대충 선호도 설문지를 작성하여 간단한 사은품 (볼펜 등)을 들고 ‘안국빌딩’ 전체를 돌았던 것이다. 당시 인피니트는 안국빌딩에 입주해 있었는데 빌딩이 다소 컸던 관계로 얼추 15여 회사가 입주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응답지를 모아 보니… 80여 개 정도…박 소장이 밝힌 내용에는 총 100명을 조사했다고 나오는데 불행이도 20여명은 허구이다. 요즘 성행하는 대리투표라고나 할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필체를 바꾸어 쓰고, 볼펜도 바꾸고… (해당 응답지는 조선맥주에서 달라고 할까봐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결국 엉터리조사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결론은 ‘하이트’의 우세승이 아니라 압도적 우위였다. 아니, 압도적 우위가 나올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당시에는 땀 흘려 가면 빌딩타기를 하면서, 스스로 많은 응답지를 체크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한탄을 하던 기억이 난다. 결과는 ‘하이트’로 결정 ! 시간도 없고 경쟁 제품은 벌써 CF 준비 중이라 그러고…

그렇게 해서 네이밍 과정이 끝났다. 힘든 프로젝트였고, 크라운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인피니트는 네이밍만큼이나 패키지 디자인을 탐냈지만, 또 당시에도 네이밍 회사라기보다는 CI, BI회사로 인지되기를 원했지만 끝내 패키지 디자인은 하지 못하였다. 여러 상황이 있었을 것이지만 매끄럽지 못했던 네이밍 과정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네이밍 이후

세상엔 운으로 결정되는 것들이 참 많다. 잘 나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울퉁불퉁 모퉁이를 돌고 나면 고속도로가 펼쳐지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들로 느껴지는 것도 당시에는 우연으로 발생하는 사건이었을 뿐인데, 그 우연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이트’신화를 완성하는 큰 역할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두산전자의 페놀사건이고, 두 번째가 OB맥주 이천공장의 수질 오염 논란이었다.

두 사건 모두 ‘OB맥주’를 물 먹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구미공장에서 흘러나온 두산전자의 페놀로 인해 같은 계열사라는 이유만으로 ‘OB맥주’가 된서리를 만났고, 이천 축산농가의 오폐수가 OB맥주 공장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를 증폭시킨 것이다. 이에 비해, 지하 150M는 얼마가 깨끗한가! 게다가 암반수라는데… 정확히는 153M 였을 것이다. 생수 제품이 넘쳐나는 지금은 지하 150M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온천 목욕탕도 그 정도는 땅을 판다. 그렇지만, 94년 당시에는…

그렇게 해서 ‘하이트’는 성공의 날개를 겹으로 달게 되었다. 박소장님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맥주 내부에서의 피나는 프로모션 활동도 주효했겠지만, 운도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제품의 시장 진입이 무사히 이루어지고 언론 등에서 올해의 히트상품 대열에 ‘하이트’를 넣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Name이 성공의 주역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심지어 필자가 만난 어떤 분은 히트할 수 밖에 없는 제품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왜냐고? 네임 그 자체에 벌써 ‘HIT’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진로 쿠어스의 ‘CASS’, 오비맥주의 ‘NEX’등과 겨룬 비열처리 맥주의 삼파전은 ‘하이트’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돌아보며…

당시의 과정을 종합하다 보면, 하이트 성공의 핵심 요인은 ‘크라운 잔재 벗겨내기’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크라운맥주’를 모르는 분들도 일부 있을 것이지만, 당시만 하여도 크라운은 조선맥주를 대표하는 통합 브랜드이기에 조선맥주 입장에서는 ‘크라운’이 전부인 시기였다. 그것을 배제하자고 한 사람이 박소장이었으니, 하이트 성공신화의 주역은 박소장이 분명하다.

필자는 지금 생각해도 네임이 ‘하이트’였기에… 네임 자체에 ‘Hit’가 있기에… 하는 말들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 보다는 처음부터 ’지하 150M 천연 암반수‘라는 브랜드 컨셉을 명확히 부각시킨 마케팅 전략을 주효했다고 본다. 네이밍, 디자인은 그 본질이 되는 브랜드 컨셉의 일부분일 뿐이다. 앞서는 것은 브랜드 컨셉이고, 네임에서 출발하여 프로모션까지 모든 마케팅 기능들은 그 본질을 보완하고 확대시키는 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2012년 지금은 어떤 상황일까?

유통의 80%를 점하는 대형 할인점에는 외국산 브랜드가 넘쳐나고 있다.

한 때 OB맥주의 경쟁자로 등장했던 ‘카스’는 99년 OB맥주로 인수되고 다시 OB맥주 그 자체가 매물로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하이트맥주는 어떠한가? 진로를 인수하여 승승장구하는 듯 하더니 최근 들어 OB맥주에 선두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국이다. 성자필쇄인가? 숨고르기인가? 몇몇 개별 브랜드의 시장 진입도 돋보이나, 18여년 전의 라인 확장도 놀라울 만큼 빼닮으면서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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